어떤 분야에서 기예가 뛰어나 유명한 사람을 명인(名人)이라 한다. 식품분야에도 명인이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하는 ‘전통식품명인’이다. 경기도에 사는 전통식품명인들을 찾아 그들의 면면을 밝히고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기까지 과정과 맛의 비결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 위치한 상촌식품 권기옥 대표이사는 궁중장을 국내 유일하게 제조하는 명인이다. ⓒ경기G뉴스 허선량


‘뚝배기보다 장맛’이란 속담이 있다. 외양보다 내실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이 속담에는 우리나라 장(醬)의 우수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장은 중국의 <주례>에 처음 등장하지만 이 당시의 장은 고기로 만든 육장이었다. 콩으로 만든 장은 삼국시대가 원조로 보는 것이 맞다.

이렇듯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장류의 역사를 재정립하고, 전 세계에 이를 알리는 데 앞장서는 이가 있다. 바로 3대째 어육장을 만들어 온 전통식품명인 상촌식품의 권기옥 대표이사가 그 주인공.

3월의 어느 날, 권기옥 명인을 만나기 위해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 위치한 상촌식품을 찾았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상촌식품 권기옥 대표이사는 메주를 만들고 발효시키는 일엔 한결같은 정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기G뉴스 허선량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산자락에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 위치한 상촌식품. 이곳에서 만난 권기옥 명인은 자줏빛 머플러를 얌전히 두르고 소녀 같은 느낌을 풍겼다.

“어육장은 궁중에서 먹던 장이에요. 민어, 도미, 꿩, 숭어 등 약 10가지 이상의 제철재료 등을 메주와 함께 넣어 발효시키는 궁중장으로, 궁에서 사대부들이 즐겼던 음식이죠. 만들기도 어렵고 숙성기간도 길어서 맛도 일반 장류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훌륭해요.”

오래된 사대부 가문이었던 권 명인의 집안. 특히 증조할아버지 때는 흥선대원군과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가문의 역사 속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궁중의 음식을 맛보며 자랐다고.

■ 화가를 꿈꾸던 소녀, 궁중장에 빠지다

“원래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고등학교 재학 시 국전에 입선했어요. 지금도 장을 만들면서 전시회를 해요. 이 나이에(올해 84세) 힘에 부치기도 하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꾸준히 하고 있어요.”

권 명인은 재작년에 작고한 남편이 3군사령부 사단장이었을 때, 지금의 상촌식품 자리인 용인에 터를 잡았다. 그 후 30여 년의 세월 동안 이곳에서 장을 만들며 사업을 확대해 왔다.

“흔히 사람들은 장이라고 하면 된장, 고추장을 떠올리지만, 장의 종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다양해요.”

임금님이 드시던 ‘꽃장’부터 10년이 넘게 숙성된 ‘진장’, 겹장(덧장), 궁중 덧된장, 궁중어육된장, 궁중어육청장 등 권 명인은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상으로 장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우리나라의 전통 장을 재현하고 이를 연구 지원하는 정부 차원의 노력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궁중장을 그대로 재현해 만드는 사람은 제가 유일해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궁중장에 대한 연구와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하죠. 오히려 일본에서 우리의 장을 가져다 연구하고, 자기네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요. 우리나라 고유의 궁중장을 일본이 가져가는 것. 가장 염려되는 부분이죠.”

권 명인이 만든 장류 제품은 중국과 일본을 넘어 저 멀리 호주까지 박람회에 출품되는 등 해외에서 더 호평을 받고 있다.

“우리 고유의 식문화에 대해선 무관심하고 외국의 것만 좋다고 받아들이는 게 문제예요. 이래선 발전이 어렵죠. 우리 자신부터 우리의 문화를 더욱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요. 이 분야에서 일을 하고 여러 관계자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정책적으로 ‘정관장’처럼 국가 차원에서 브랜드화하는 전략이 우리 장류 문화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궁중장을 담그는 일은 워낙 손이 많이 가는 만큼 사명감 없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이를 이어갈 사람이 현재 없다는 점이다. 권 명인은 며느리와 함께 일일이 수작업으로 이 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유리로 둘러싸인 높다란 천장과 옆으로는 통풍이 가능한 방충망이 설치된 권기옥표 ‘장 익는 온실’에서 50여개 항아리 속 장이 익어간다. ⓒ경기G뉴스 허선량


■ ‘장 익는 온실’에서 인내와 함께 익어가는 명품장

“어육장을 처음 만들어서 꺼내보면 엄청나게 비려서 먹을 수가 없어요. 하지만 평균 5~6년 숙성을 시키면 구수하고 그 감칠맛이 말도 못 하게 맛있죠.”

궁중장은 숙성기간이 길어서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 그의 공장 옆에는 망으로 쳐진 하우스 안에서 항아리마다 각종 다양한 장류들이 뚜껑을 열고 햇볕을 쬐고 있다.

“메주를 반으로 갈라보면 누르스름하고 희끗희끗한 것을 볼 수 있어요. 이는 숙성실에서 제대로 발효가 돼 유익한 균이 만들어졌다는 뜻이죠. 장은 익을 때 구수한 향에 파리가 엄청나게 꼬여요. 아무리 뚜껑을 닫아놔도 기어코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알을 낳죠. TV를 보면 된장독이 아름답게 펼쳐진 장면이 나오곤 하는데 대부분은 빈 항아리일 거예요. 정작 장이 들어있는 항아리는 그렇게 한데다 놔두면 구더기 때문에 못 먹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이곳의 된장, 간장 항아리들은 모두 온실에 들어가 있다. 유리로 둘러싸인 높다란 천장과 옆으로는 통풍이 가능한 방충망이 설치된 권기옥표 ‘장 익는 온실’이다.

50여개 항아리들은 관리도 까다롭다. 아침마다 들어가 항아리 뚜껑을 열고 햇빛과 바람을 쐬어 주어야 한다. 또 장이 익어 양이 줄어든 간장에는 첨장을 해줘야 세월에 농익은 장맛을 탄생시킬 수 있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권기옥 명인은 “임금님이 드시던 ‘꽃장’부터 10년이 넘게 숙성된 ‘진장’, 겹장(덧장), 궁중 덧된장, 궁중어육된장, 궁중어육청장 등 장의 종류는 상상 이상으로 매우 다양하다”고 전했다. ⓒ경기G뉴스 허선량


■ “전통의 이름으로 고난 이겨낸 만큼 교육에 전념하고파”

“제대로 된 ‘궁중장고’를 만들어 볼 계획이에요. 현재 경복궁에 있는 것은 제대로 된 게 아니에요. 또 임금님의 수라상을 정식으로 제대로 만들어보려고 해요. 제가 만든 교본이 교과서처럼 쓰일 수 있는 게 소망입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이어온 궁중장이 미래 세대에게도 전승돼 발전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권기옥 명인.

최근 인스턴트 식문화와 혼밥족이 늘면서 온 가족이 함께 상에 둘러앉아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여 먹는 모습조차 점점 보기 힘든 세상이 돼 가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우리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길을 가는 권기옥 명인 같은 이들이 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장은 익어간다. 향긋한 장 향기가 피어오를 때쯤, 용인 백암에서 궁중장을 체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

㈜상촌식품
▲ 위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박곡리 216번길 20-62
(031)332-4289 / www.unmal.co.kr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상촌식품에서 판매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장류들. 풍부한 맛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경기G뉴스 허선량